프롤로그
- 숲지기

- 2023년 12월 20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12월 21일
그 사건
최초의 인간이 이 지구상에 등장하기 이전, 나무들이 먼저 땅에 존재했다. 그때의 나무들은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저 존재하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무들은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조차 없었다. 나무들이 그런 종류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것도 지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이 출현했다. 사람은 나무와 달리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였다. 그는 스스로 어떤 존재로서 존재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무를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가진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 그는 나무를 의자로 삼고, 나무를 도낏자루로 삼으며, 나무를 지팡이로 삼기도 했다.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의 출현과 동시에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는 인간과 같은 가능성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최초의 인간이 등장하는 순간 지상의 모든 나무들에게 동시에 이 일이 일어났다. 바로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일. 인간의 등장은 나무들의 세계에서 전 지구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이 일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무를 일시에 깨웠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의식의 전이는 정작 인간 스스로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은 채 한순간에 일어났다. 나무가 아닌 어떤 존재의 등장이 모든 나무에게 가능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나무가 가능성을 가지게 됐다고 해서, 모든 나무가 필연적으로 어떤 의미나 목적을 부여받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지만, 나무는 그럴 수 없었다. 애초에 나무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하여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나무는 그저 자신이 깨어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량이 닿는 만큼 존재하고 있어야 했다. 나무는 그저 어떤 의미의 존재를 부여받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나무에게 그러한 가능성을 부여한 것도, 가능성을 넘어 어떤 의미의 존재를 확정하는 것도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끼를 든 사람이 나무 앞에 서 있을 때, 비로소 나무는 그로부터 존재의 의미가 결정되는 순간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도끼를 든 그 사람은 나무에게서 자신이 전에 부여한 가능성을 제거하고, 가능성이 없는 존재의 의미를 확정 지우는 것이다.
나무들은 시간이 얼마큼 지나는지를 헤아리지 않는다. 그것은 나무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시간으로 대략 2000년 전 그즈음, 그러니까 언제인지가 중요하지 않게 된 어느 때, 나무꾼들이 자주 드나드는 숲이 하나 있었다. 숲의 나무들은 나무꾼이 숲으로 들어올 때마다 요동치는 가능성으로 그 깨어남을 종용받곤 했다. 그 숲은 지상에 있는 숲 중에서는 제법 요란스러운 숲 중 하나였다. 그 숲에서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이를테면, 옛날 어떤 나무는 지팡이로 존재 지워졌는데, 어디로부터인가 새로운 가능성이 그 나무를 다시 깨웠고, 지팡이가 된 그 나무는 다시 싹을 틔웠다는 내용이다. 한번 운명이 결정되면, 그 운명이 다 하는 날까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 이치였다. 그러나 한번 완전히 소멸한 가능성이 다시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받았다는 전설은 그 숲에서는 노상 전해지고 있는 이야깃거리였다.
종종 그 숲에 들어와 아버지와 함께 와서 나무하는 것을 배우던 젊은이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자신의 동생들을 데리고 와서 아버지에게 배운 것을 전수해주고 있었다. 숲의 한 모퉁이에는 존재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한 산딸나무가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 ✤ ✤ 그 나무의 기억 ✤ ✤ ✤
나무들은 저마다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나도 지나가는 어떤 이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나무는 시간이 얼마만큼 지나는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빛뿐입니다. 우리를 비추는 빛만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사랑합니다.
또 그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우리가 빛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 이입니다. 그는 목수입니다. 그가 종종 이 숲을 찾아와 어떤 나무를 운명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보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 중 누구를 선택하든 놀랍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임을 우리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 말고도 목수는 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목수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처럼 빛을 사랑합니다. 그는 종종 여기에 찾아와 빛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모든 나무가 빛을 사랑하지만, 빛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에 한 떨기나무에게 빛이 내려와 온몸으로 그를 안아주었다는 말은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빛과 대화를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 목수가 이 숲에 들어와 빛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나무들은 그 찬란한 빛의 향연에 넋을 잃었습니다. 둘은 서로 사랑을 나눴습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는 너무나도 달콤했습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빛과 닮아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여기에 오는 것이 좋았습니다. 나는 다른 목수가 아닌 그가 나를 운명으로 인도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때도 그는 우리를 바라봐 주었습니다. 빛과 대화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여느 때와는 달랐습니다. 그런 얼굴은 산짐승에게 쫓기는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얼굴이었습니다.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이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나에게 있는 가능성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나무를 선택하는데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천천히 그는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그가 내 운명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두려움 가득했고, 나의 가능성은 극한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선택했습니다. 그가 내 운명으로 나를 인도해가는 것입니다.
“형님, 어째서 이 일을 하신다고 하셨습니까? 사형대를 만드는 것은 형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어머니를 모시기에 어렵지 않은데, 왜 이런 일을 맡아오신 것입니까?”
“너도나도 이 일을 거절하여 이것을 만든다고 나서는 목수가 없다고 하였다. 게다가 이만한 산딸나무를 다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느냐.”
“당연하지요. 형님,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죽임을 당할 나무를 깎는 일을 누가 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런 일은 율법을 어겼거나 하나님을 저주한 목수에게나 맡겨져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공의로우신 분이시니 그런 그분이 내리는 저주는 마땅히 의롭고 공의로운 심판이 아니냐? 하나님의 공의로 사람을 심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저주인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되 그 앞에 선 사람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니 이 나무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
나는 빛과 함께 사랑했던 그가 나를 저주의 나무로 결정짓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의 고정될 가능성은 저주의 나무입니다. 나는 그 비참한 가능성 앞에서 사냥꾼의 살에 맞아 죽음을 기다리며 신음하던 한 짐승의 소리가 들립니다. 이 가능성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제 확정된 내 존재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저주의 나무가 바로 확정된 내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게 확정시킨 건 다름 아닌 내가 최초로 사랑했던 한 인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 닥칠 결정된 가능성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가 나를 깎아내리는 끌의 끝이 나의 운명을 더욱 내 앞에 단단히 결정시킵니다.
전에 나는 우리가 사랑했던 이의 손에 이끌려 그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음에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를 사형대로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사형대가 되는 나무의 운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주받은 나무, 그것이 바로 사형대가 되는 나무가 가진 운명입니다. 비로소 나는 내가 숲에 있을 때 가지고 있었던 가능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깨닫습니다. 가능성이 제거된 뒤에 다시 어떤 가능성을 부여받았다는 전설 속의 그 나무 이야기가 왜 그토록 기이하면서도 오랫동안 전해져왔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이야기만이 나의 제거되어 가는 가능성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가 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나를 아주 천천히 다듬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그가 저주받을 운명에 처한 나의 처지를 생각하는지, 아니면 나에게 달릴 죄인을 생각하는지, 아니면 내게 저주를 내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조금의 빛도 느낄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이곳에는 형틀이 된 다른 나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저주받을 운명의 나무들입니다. 이따금 누군가가 와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은 우리가 한 명의 죄인을 죽이고 버려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전히 시간이 지나가는 것은 나무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능성이 없는 가능성 앞에서 나는 그 없는 가능성을 더욱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생각을 멈춥니다.
어떤 이들이 나를 빛으로 인도해갑니다. 인도된 곳에는 나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그가 있습니다. 그가 내게 다가옵니다. 왜 그가 다시 내 앞에 서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가 전에 제 앞에 섰던 날처럼 가능성이 다시 요동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전보다 더 뚜렷하게 두려움의 얼굴을 하고 있습 니다. 그가 나를 온몸으로 껴안습니다. 그의 온몸과 손이 떨고 있습니다. 그의 뜨거운 눈물과 피가 느껴집니다. 그가 나를 기어코 존재 의미의 궁극적인 가능성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주받은 나무로 결정될 나의 마지막 장소를 어째서 그가 인도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나무들을 최초로 깨운 그 가능성이 나에게 가져다준 모든 생각의 능력을 다하여 생각합니다. 나는 한때 그가 내 앞에 서는 것을 간절히 원했고, 그러나 그가 내 앞에 선 뒤에는 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왜 이 저주의 길을 나와 함께 가고 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못이 그의 손을 지나 내게 박힙니다. 그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릅니다. 그가 나의 몸에 박힌 채로 나는 땅에 박힙니다. 그가 또 비명을 내지릅니다. 그를 원망했던 나는 그를 매달고도 그에게 어떤 다른 의미가 될 가능성을 가질 수 없는 지금 나를 원망합니다. 처음으로 가능성을 부여받기 전에 있던 순수한 나의 존재 자체를 원망합니다. 이 존재는 왜 거기에 존재했었는가? 왜 그 씨앗은 돌 짝 밭이나 가시덩굴에 떨어지지 않았는가? 갖은 생각을 토해내도 결국 이 모든 생각은 막다른 길에 봉착합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나의 존재는 나입니다. 그의 피가 나를 적시고 흘러내립니다.
그와 항상 함께 있었고, 나무들에게 유일한 의미가 되어주던 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 매달려 있습니다. 그는 우리처럼 빛을 사랑했고 그는 나를 바라봐 주었고 그는 나를 저주받은 나무의 운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가 지금 내게 매달려 저주받은 나무라는 내 존재 의미를 함께 당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이 그가 가진 존재의 가능성을 이 땅의 모든 나무에게 전이시켰듯이, 지금 나는 결정된 내 존재의 의미를 내게 달린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그 최초의 인간은 모든 나무를 깨웠는데, 나는 지금 한 인간을 저주 가운데 죽게 하고 있습니다. 이 역설적인 일을 나는 지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서 더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뜨거웠던 몸이 식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그를 끌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언덕 너머로 던져졌습니다. 나의 존재 의미가 완성되었고, 이제 가능성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 다다랐을 때였습니다.
✤ ✤ ✤ 새로운 가능성의 나무 ✤ ✤ ✤
나무들이 이 땅에 존재하기 시작한 다음 날부터 빛은 줄곧 동쪽으로부터 떠올라 지상을 비추어왔다. 그때에도 여느 때와 같이 빛이 동쪽으로부터 떠올라 언덕 아래에 떨어져 있던 저주받은 나무, 바로 그 떨기나무를 비추기 시작했다. 무관해 보이는 어떤 작은 일이라도 그 일이 얼마나 큰 사건을 만들어 낼지는 알 수 없다. 한 인간의 출현으로 모든 나무가 깨어나게 된 날 그것을 인간이 알 수 있었을까? 나무들은 알 수 있었을까? 그날은 이 전의 여느 날과 비교해서 더 특별하다거나 어떤 거대한 일이 일어날 징조를 보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특별함이나 징조는 어디까지나 과거를 회상할 때만 부여할 수 있는 의미였다. 빛을 사랑하고, 빛과 대화하던 한 젊은이가 한 산딸나무 앞에 섰던 날도 그러했다. 저주받은 나무가 된 그 산딸나무가 언덕 아래에서 어김없이 떠오르는 빛을 받았던 바로 그날도 그러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한 번도 그러한 일이 있었노라고 전해진 적이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존재 의미가 결정되어 가능성이 제거된 한 나무에게 빛이 다가와 말을 했다. 그 말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 나무에 이전에 매달려 저주받은 죽임을 당했던 그 사람이 어떤 소녀의 시체에 대고 했던 말이었을 것이라고도 하고, 또 아닐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빛이 그 가능성이 제거된 나무를 향해 말을 했을 때, 그 나무에게 돌연 새로운 가능성이 부여된 것이다.
나무는 다시 깨어났고, 이 전에 결정되었던 저주받은 나무가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나무가 되었다. 이전에 나무가 가졌던 가능성은 가능성의 소멸을 기다리는 가능성이었다. 어떤 의미나 목적으로써의 존재를 달성하게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존재의 달성은 가능성의 소멸이었고, 가능성의 소멸은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순수한 존재의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그날에 그 나무에게 부여된 새로운 가능성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어떤 의미나 목적으로써 존재가 영원히 끝나지 않고 남아있는 가능성이었다. 끝나지 않는 가능성. 존재의 의미가 영원히 달성되지 않는 가능성. 가능성 그 자체가 존재의 의미가 되는 존재, 새로운 가능성은 나무를 그런 존재로 새롭게 깨어나게 했다. 나무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리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일을 이해 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빛은 여느 때처럼 매일 아침 동쪽으로부터 떠올라 나무를 비췄으나, 나무는 그 빛이 머무는 시간을 염원하게 되었다. 나무에게 시간이 의미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무는 그 염원이 바로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내는 데 또한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 나무는 다시 뿌리를 내리고, 다시 가지를 뻗고, 다시 잎을 내고, 다시 꽃을 틔우고, 다시 열매를 맺었다. 그때 나무는 그가 낸 열매가 이전에 냈던 산딸열매가 아님을 알았고, 그때가 비로소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나무가 알아차리기 시작한 때였다.
열매에서 씨가 났고, 씨가 떨어져 또 다른 나무가 되었다. 그 나무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나무였다. 새로운 가능성의 나무들은 시간과 함께 점점 퍼져나갔다. 빛과 시간이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그 나무들은 이제 이 전에 존재하던 나무들과는 다른 생각을 한다. 이제 이 나무들은 자신들이 가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이런 가능성이 부여된 그 사건, 저주받은 산딸나무였던 그 나무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생각한다. 이 나무들은 그 사건을 매일 아침 빛이 그들에게 비추기 시작할 무렵부터 생각한다. 어떤 일이 여기서 일어났었는가? 시간이 지나며 나무들은 숲을 이루었고, 그 나무들의 생각도 거대해져 갔다. 생각은 존재의 명백함으로부터 기초 지워졌고, 현재의 자명한 상태로부터 경계 지워졌다. 나무들은 그 사건과 빛, 시간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그 사건을 기억하고, 빛과 마주하는 시간은 나무들의 이해가 깊어지는 만큼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 ✤ ✤ 내 이야기 ✤ ✤ ✤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우연한 길목으로부터 그 숲에 들어가게 됐다. 숲에 들어가 나무들을 볼 때, 나에게 그 나무들의 생각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 그 나무들의 생각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신성한 숲이 빛으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매일 그 숲을 찾아가 나무들의 생각을 들었다. 나무들은 매일 나에게 자신들의 깊은 생각들을 나누어 주었다. 나는 그 사건을 나무들과 함께 기억했다. 나무들과 함께 그 사건을 기억하는 시간은 황홀한 시간이었다. 그 사건은 매일 기억해도 거룩했고, 신비했다. 나는 나무들과 함께 그 사건을 기억할 때마다 내 안에 무엇인가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 그 요동은 기쁨이고, 감격이고, 형언할 수 없는 기대감과 그리움이라고 나무들이 알려주었다. 나는 그 생각하는 나무들의 숲속에서 그 나무들처럼 빛과 시간에 의미를 갖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나에게도 그 새로운 가능성이 부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이고,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여전히 나무들의 생각을 듣고 있다.
그러나 이름은 내가 그것을 알기 전부터 기록되어 있었다. 그 사건을 알고, 그 사건을 통해 빛과 시간의 의미를 갖게 된 사람은 ‘크리스천(Christian)’으로 불린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숲을 알리고, 이 숲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나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내게 알려준다. 나는 내가 듣고 알게 된 이 생각들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 최초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깨어난 그 나무는 ‘디바인 트리(The Divine Tree)’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 숲은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의 숲(생·크·림林)’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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