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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선으로부터 연역되는 논리적 세계관


작성자 : 최욱


1. 서론: 논쟁의 요약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구원론에서는 커다란 논쟁 하나가 있는데 바로 [인간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행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적 선택을 요구하는가?]의 논쟁이다. 이 논쟁은 4세기 기독교 교부였던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를 정죄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펠라기우스는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는데, 어거스틴은 이를 정죄하면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이후 중세를 지나면서 반(半)펠라기우스주의가 있었고, 이 것이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으로 이어졌고, 이후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로 이어졌다.

이 논쟁에서 양편은 모두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양편 모두 인간은 타락한 죄인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얻는 믿음을 선택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부터 시작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적 선택이라는 주장으로 부터 시작한다. 각각에서 드러나는 문제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구원이 인간의 선택에 달린 것이라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전적으로 수동적인 입장에 서 계시며 따라서 무능하신 하나님이 되어 버린다. 논쟁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전제에서 그 차이를 발하여, 하나님의 속성에서 각각이 문제들이 드러난다. 인간론에서 시작된 논쟁이 신론에 까지 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2. 논쟁을 이끄는 성서주석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신약성경이 정경화된 이후 기독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학적 논쟁들의 외연은 성서로 제한되었다. 이로써 교회의 논쟁들의 서로 다른 각 진영에 속한 인물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증거하기 위하여 성서를 주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를 주석하는 것이 기독교 논쟁의 쟁점이 된 것은 어쩌면 기독교 논쟁점들의 통일성을 방해하여 그 논쟁들이 길고 지리하리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 예들을 살펴보자.


1) 펠라기우스 논쟁

4세기 히포의 주교로 활동했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펠라기우스가 선행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을 논박한 신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배격하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가 쓴 [은혜와 자유 의지에 대하여]에서 고린도전서 15장 9절과 10절을 주석하면서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과 다른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펠라기우스파는 스가랴 1장 3절, 역대하 15장 2절을 근거로 인간의 공로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한 권의 정경 안에 들어있는 각각의 구절들을 통해서 서로 상충되는 주장의 근거가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2) 루터와 에라스무스 논쟁

1517년 95개 조문을 비텐베르크 대학교회에 내걸어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1483~1546)는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무스(1466~1536)와 자유의지에 관한 열띈 논쟁일 벌였다. 둘의 논쟁을 살펴보면 좀 더 성서해석학적 문제가 표면화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에라스무스는 집회서 15장 16절 "너의 손을 뻗어 네 마음대로 택하라"를 근거로 들어 인간의 자유의지를 성경이 말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루터는 해당 구절이 비유적 해석을 할 여지가 없는 단순 진술형의 문장이라고 말한다. Ibid., 234

동일한 구절에 대한 양측의 서로 다른 이해는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성서해석이 각각의 주관적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논쟁

이와 같은 해석의 문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사이의 논쟁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서 6장 4~6절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각 진영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이 구절을 두고 한번 구원을 받은 자들은 타락한 자들이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읽는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주의 진영에서는 이 구절을 한번 구원 받았으나 다시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경고로 읽는다. 이와 같은 이해의 차이점은 텍스트를 해석하는 근본적인 이해로 부터 기인한다.




3. 성서주석의 해석학적 한계

이러한 해석학적 견해의 차이는 현대에 성서해석학이라는 신학적 주제가 대두되면서 좀 더 분명하게 이해되고 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768 ~ 1834)의 연구에 의해 하나의 학문 분과로 탄생한 해석학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성서해석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해석학은 근본적으로 과연 우리가 타당하고 신뢰할만한 성서 해석을 합의해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전통적으로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은 일련의 규칙들을 통하여 연역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일에는 각 개인의 상황과 환경 그리고 경험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을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언어의 의미와 체계는 모두 우리가 처한 제한적 경험과 상황 가운데서 일어나게 된다. 좀 더 근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각자가 가진 관점들에 따라 언어의 의미가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해석학에는 다음과 같은 회의주의가 창궐하게 되는데, 성경의 저자는 현대의 우리와 오랜 역사의 차이를 두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텍스트가 의미한 정확한 의미를 특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회의주의는 물론 많은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으로 진리의 합일에 도달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드러내주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내의 논쟁들이 성서를 주석하는 것에 그 근거가 뒷받침되는 것은 그러한 논쟁들이 오랜 역사를 갖게 한 주요한 원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랜 기독교의 논쟁들에 있어서 성서를 주석하는 것 혹은 성서로부터 그 근거를 얻는 것을 가장 처음이 아니라 가장 나중에 배치해야 할 것이다. 성서는 기독교의 외연으로서 존재한다. 성서는 최종적인 권위이며, 기독교에 관한 모든 명제들의 최후 점검대다. 성서에 대한 권위를 상실하는 순간이 기독교적 논의에서 철학적 논의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그러나 성서의 해석이 뒷받침하고 있는 명제들은 논쟁들을 축소시키기 보다는 확장시키는 쪽으로 갈 때가 더 많다. 따라서 우리는 해당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텍스트를 왜 그렇게 해석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핵심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논쟁의 쟁점은 해석학에서 기독교 세계관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4. 논리적인 세계관은 오직 신학에서만 가능함

논쟁을 도출하는 가장 근본적인 대전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관점이다. 신학과 철학 그리고 과학에 이르기까지 자유의지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커다란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철학에서 자유의지의 문제는 시간에 대한 관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역사가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역사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면 분명 이 세상에는 모종의 자유가 존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근대에 과학이 발달하면서 유물론적 사관이 힘을 얻으며 이 세계의 모든 사건들이 기계적인 움직임에 의해 발생한다는 생각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 아래에 인간의 의지적인 행동으로 여겨지는 것들 또한 단지 뇌에서 일어나는 입자와 전자기 신호에 의한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미시적 세계에서 입자의 움직임은 불확정적이라는 점과 혼돈이론이 엮여서 결국 미래는 불확정적이며 따라서 모종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철학과 과학에서 이루어지는 자유의지에 대한 이런식의 논의들은 모두 관찰과 사고실험에 의해 진행된다. 시간이 정말 결정적인가에 대해 쌍둥이의 역설등을 가지고 모종의 사고 논리실험을 진행하지만, 결국 양 진영 모두 자신들의 주장을 전제로 하는 근거들에 매달릴 뿐이다.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결국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느냐의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를테면, 양자세계와 거시적 세계의 연관성이나 뇌신경의 체계 따위의 것들에 근본적인 대전제가 숨어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주장에 맞는 이론이나 근거들을 들고나올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대전제를 설정하고 그로부터 정리를 도출해내는 논리적인 전개를 해야만 한다. 이러한 작업은 철학이나 과학에서는 할 수가 없고 오직 신학에서만 가능한데, 왜냐하면 신학만이 모든 것을 정초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상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절대 선으로서의 하나님(공리1 도출)

기독교의 세계관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상정한다. 신으로부터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세계관은 기독교를 특징짓는 세계관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세계관을 논의하는 데 가장 근본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부분은 신론에 있다. 오랫동안 기독교 신관의 논쟁점으로 있었던 삼위일체에 관한 논의는 신관의 공리를 설정하는 데 있어 적절한 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 자체가 이미 해석학적 논쟁의 한 복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좀 더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명제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눅 18:19). 예수 그리스도가 진술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한 성품은 기독교의 신관에 있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할 명제이다. 왜냐하면 이 명제가 동일률의 원칙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명제가 논리적 원칙에 의하여 제한되기에 공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성립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조금이라도 악할 가능성을 두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악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하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관점은 기독교적 논의를 벗어난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동일률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신학적 공리를 설정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적 공리1 : 하나님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절대 선하신 분이시다.




6. 절대 선의 거룩성(공리2 도출)

앞서 설정 된 [기독교 신학적 공리1]로 부터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중요한 원칙 한 가지를 추출해 낼 수 있다. 그것은 절대 선에 대한 고찰에서 비롯된다. 절대 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배중률의 원칙 아래에 있다. 즉, 조금이라도 선이 아닌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의 반대로 말하는 악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말한다. 이는 어거스틴의 악에 대한 정의를 떠올리게 한다. 어거스틴은 악을 정의하기 위해 '선의 결핍'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어거스틴의 생각은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인 플로티누스로부터 기인한다. 플로티누스는 신이 절대 선이라면 절대 선으로부터는 악이 기인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의 완전성을 근거로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따라 하나님이 절대 선이라는 공리는 절대 선과 악이 배중률의 원칙 아래에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나님과 악의 배중률은 절대 선이 아닌 어떤 존재도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 선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는 절대 선하지 않은 어떤 존재를 영원히 용납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더 이상 절대 선으로 부를 수 없는 상태로 만든다. 왜냐하면 절대 선은 배중률의 원칙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얼마간의 집행유예나 절대선이 일정 기간 인내하는 것은 가정할 수 있으나 절대 선에게 악이 용납되는 것은 결코 상정할 수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번째 공리가 도출된다.


기독교 신학적 공리2 : 하나님은 절대 선 외를 용납할 수 없다.(절대 선이 가지는 배중률의 원칙 특징)




7. 현재 이 세상의 상태

위의 두가지 신학적 공리를 대전제로 해서 풀어가야 할 문제는 자유의지의 존재 문제이다. 우선 우리가 자유의지의 유무에 대해 논하는 대상은 이 세계이다. 이 세계에는 모종의 자유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이 세계는 단지 잘 짜여진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는 기계적인 세계일 뿐인가? 이 세계에 속한 인간 또한 자유의지를 가지는가? 이러한 질문은 절대 선으로 부터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고찰해 봐야 한다. 절대 선으로 부터의 창조를 고려 할 때 이 세계에 자유의지의 유무에 어떤 제약이 나타나는가를 살펴 봐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 선의 하나님이 우리가 대전제로 삼고 있는 공리이기 때문이다.

절대 선은 절대 선 외를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절대 선으로 부터 창조된 이 세계는 분명 절대 선하지 않다. 이 세계에는 악이 창궐하는 불완전한 세상이고, 인간도 그렇다. 그렇다면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절대 선으로 부터 창조 된 이 세상은 결코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절대 선과의 모순을 일으킨다. 불완전함은 지금 집행유예되고 있을 뿐, 종국에는 절대 선의 속성에 의해 종결될 수 밖에 없다. 다시말해 현재의 이 세상은 절대 선으로 부터 일정한 격리를 두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절대 선과 함께 할 수 없는 불완전함을 가진 이 세상은 절대 선으로 부터 창조되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존재하기 위해서 절대 선으로 부터 격리되어 있어야 하며 이 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수도 없다.




8. 절대 선의 세부 속성 세가지 & 창조의 이유(동기)

그렇다면 절대 선과 함께 할 수도 없고, 지속될 수도 없는 이 세상을 절대 선은 왜 창조하였는가? 절대 선에 대한 좀 더 심도있는 고찰로 들어가 보자.

우리의 인지능력은 절대 선의 창조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절대 선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도 인간의 인식으로 부터 기인한 것인데, 인간이 선과 악을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부터 이다. 철학에서는 인간이 사고하고 판단하는 범주를 세가지로 구분해왔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인식)",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윤리)", "무엇을 바라는가?(미학)"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 선이라고 할때 하나님의 그 선함을 구체적인 범주로 표현한자면 이렇다. "절대적으로 논리적이신 분(전지성)", "절대적인 당위를 가지신 분(공의성)", "절대적으로 좋으신 분(사랑/인격성)" 하나님을 절대 선이라고 할 때, 절대 선의 하위 범주로 이와 같은 세가지 속성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인격성)의 속성은 반드시 '대상'을 필요로 한다. 사랑이란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에게 품는 종류의 것이다. 따라서 절대 선으로서의 하나님은 (사랑/인격성)의 속성에 따라 인격적인 사랑을 나눌 무한에 가까운 '대상'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기독교와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묘사해왔고, 하나님의 사랑의 활동이 모든 것을 창조해 냈다고 고백해왔다. 하나님을 절대 선으로 정의할때 하나님 안에는 사랑과 인격성의 속성이 포함되는 것이며, 이 속성은 그러한 관계를 가질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절대 선은 창조의 행위를 하게 된다.




9. 창조에 있는 딜레마

사랑과 인격성의 속성은 절대 선으로 하여금 창조의 행위를 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창조의 행위에 제약을 가하게 된다. 창조되는 대상은 하나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써 하나님과 독립된 자유적 개체이어야 한다. 만약 창조된 대상이 하나님의 속성으로 부터 분리되지 않은 기계적 존재라면, 하나님은 아무런 대상도 얻지 못한 셈이다. 동시에 자유가 없는 존재는 사랑의 대상으로써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즉,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되는 존재는 절대 선과 독립된 자유개체여야만 한다는 조건이 생성된다.

그런데 여기서 절대 선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 절대 선은 사랑의 대상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독립된 자유 개체여야만 한다. 그러나 독립된 자유 개체는 [기독교 신학적 공리 2]에 의하여 절대 선으로 부터 용납받을 수 없다. 즉, 절대 선은 절대 선과 동일하면서도 독립된 자유 개체를 얻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 딜레마는 어떤 방법으로 해소될 수 있는가?





10. 창조의 딜레마 해소를 위한 창조세계와 창조주의 분리(이 세계의 자유)

지금 사랑의 대상은 독립된 자유개체여야만 한다는 점과 절대 선 외를 용납할 수 없는 절대 선의 공리가 충돌하고 있다. 절대 선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여 궁극적인 목적 즉, 절대 선과 동일하면서도 독립된 자유 개체를 무수히 얻어내는 일에 다다르고자 한다. 절대 선은 충돌하는 두 명제를 모두 일정 기간 유예시킨다. 이 것은 현재 불완전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해 준다. 절대 선은 창조의 행위를 통해 자유를 가진 독립된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동시에 절대 선은 아직 사랑의 대상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절대 선은 이 세계와 함께하고 있지 않다. 즉, 지금의 세계는 필연적이고 당연하게도 절대 선이 내재되어 있는 세계일 수 없으며(왜냐하면 불완전한 세계이므로), 또한 모종의 자유를 지닌 세계일 수 밖에 없다.




11. 이 세계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고찰

잠시 현재 이 세계에서 자유에 대한 고찰을 해 봄으로써 창조에 첨가된 자유가 어떠한 자유였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매우 높은 자유도를 지니고 있다. 자연에서는 가능한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아주 특수한 개입이 없는 한 자연은 그 일어나야할 가능성에 한하여 일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인격체의 의지에 있어서 자유도는 어떠한가? 인간을 비롯하여 의지를 지니는 피조물들의 경우 스스로 결정하는 의지적 행동을 보인다. 이 의지적 행동이 다만 물리적 현상에 따른 필연적 결과인지 아닌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현상적으로 의지적 행동은 독단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상황과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를 논할 때 자주 망각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라고 부르는 것이 독립되어 독단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이전에 인간은 이 세계에 포함된 존재이며, 이 세계로 부터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을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물리적 세계는 높은 자유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자유로운 물리적 세계의 일부로 존재하는 한 인간은 자유로운 세계와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선택한다. 따라서 인간 전체로 볼 때 인간이라는 종은 분명 매우 높은 자유도를 지니고 있다. 지능이 낮은 다른 종에 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폭은 매우 넓으며, 따라서 대단히 큰 범위의 자유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일 개체로서 한 인간의 자유를 따져본다면, 넓지 않은 자유도를 보여준다. 자유의지에 대한 고찰로 유명한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자. 담배를 피우는 A는 담배를 끊고 싶어한다. 그러나 A는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다. A에게는 담배를 끊을 자유가 있지만 의지가 부족하다. 반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B는 담배를 피우고 싶지 않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B에게는 담배를 피울 자유가 있지만 담배를 피울 의지가 없다. C는 담배를 끊고 싶지도 않고,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담배를 사기 위해 가게로 갔지만, 몇군데의 가게를 돌아보아도 모두 문을 닫아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고 있다. C는 담배를 피울 의지는 있으나 담배가 없기 때문에 담배를 피울 자유는 없다. 이 예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단일 개체로서는 무수히 많은 상대적 상황 가운데 자유의지가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 전체로 보면 인간에게는 분명 담배를 피거나 끊을 자유와 자유의지가 모두 주어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담배를 피우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다양한 변수들이 서로 얽혀서 자유의지를 제한하게 된다.

자유의지에 대한 고찰은 사실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 세계에는 무수한 자유가 존재한다. 따라서 자유롭게 일어나는 개별적인 사건들이 무수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사건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건에 상황을 부여함으로써 영향을 주고 받는다. 따라서 인간에게 분명 자유의지가 부여되어 있지만, 그 자유의지 또한 이 세계의 무수히 많은 자유로운 다른 사건들에 의해 상황적으로 제한을 받는다. 따라서 이 세계에 일어나는 단일 사건은 독단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제한적이며, 대부분의 사건은 인과적, 상황적으로 다양한 사건들의 영향 아래에서만 일어나게 된다. 사실을 알고 볼 때 자유가 부여된 다양한 독립된 개체들이 존재하는 자유로운 세계에서는 필연적으로 개별적 개체들의 자유 범위가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양자역학의 난제는 사실 당연한 현상이다. 외부의 어떤 계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는 단일 개체는 당연히 높은 자유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확률로 존재한다. 그러나 일단 외부의 어떤 계로부터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순간부터 그 개체의 자유는 제한되게 된다. 기독교의 세계관 안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고찰이 현대 물리학과 일치되는 순간이다.




12. 구원사는 사랑의 대상을 얻기 위한 과정

다시 앞서의 논점으로 돌아가자. 현재의 상태 즉, 하나님께서 내재하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과 독립되어 있고, 자유가 있는 세계의 상태는 결과적으로 절대 선과 동일한 존재의 양산을 이루어 내야만 한다. 왜나하면 그 것이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다다르면 이 세상 역사에 끼어드는 절대 선의 구속사를 상기하게 된다.

절대 선은 일련의 절차를 통하여 이 세계의 불완전한 피조물을 완전한 절대 선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일을 벌였다. 이 과정은 우리가 구원사역이라고 부르는 과정으로써,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희생을 통하여 완전히 의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게 되는지는 별도로 살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원사라고 하는 이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절대 선에 만족하면서도 하나님과 독립된 자유를 가진 무수히 많은 인격체들을 얻게 된다.




13. 절대 선이 불완전한 피조물을 구원할 수 있는 조건

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 보아야할 시점에 와 있다. 왜냐하면 창조의 목적이 구원의 결과에 있다면, 우리는 그 과정이 어떤 제약을 가지는지 살펴 볼때, 창조가 어떤 원칙 아래에 이루어졌어야만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절대 선의 하나님과 불완전한 인간이 만나는 지점으로 가 보자. 절대 선의 하나님이 홀로 있을 때는 그 스스로의 성품으로 인한 딜레마가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절대 선과 그로부터 창조된 불완전한 존재의 만남은 절대 선의 내면으로 부터 딜레마를 일으키게 된다. 불완전한 존재가 절대 선 앞에 있을 때,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한 사랑/인격성의 속성은 그 존재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 피조물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무조건 적인 용서를 발산할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윤리적 속성(당위적 속성), 다시말해 하나님의 공의성은 불완전한 피조물을 결코 용인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절대 선으로써의 하나님 안에 있는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공의가 상호 충돌하는 딜레마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 딜레마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선택권을 상실하게 만든다.(따라서 창조에 있어서 피조물의 독립성을 만족시킴) 달리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하나님 편에서는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절대 선 안에 있는 두가지의 절대적 속성이 상호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 선은 모순 상황에 놓이게 됐고, 절대 선이기 때문에 두가지의 속성은 상호 어떠한 타협도 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불완전한 피조물이라는 특정한 상황이 절대 선과 만났을 때 생기는 필연적인 딜레마인 것이다. 이제 상황은 피조물의 반응에 따라 두 가지 가능성으로 향할수 있다.


1) 절대 선 앞에서 피조물이 취할 수 있는 반응(1) : 불완전한 피조물이 절대 선 앞에서 공의를 원하는 경우

불완전한 피조물이 절대 선 앞에서 공의로움을 원한다. 이러한 상황은 사랑/인격성의 속성과 모순을 일으킨다. 공의를 바라는 불완전한 피조물의 상황이 절대적인 사랑/인격성과 충돌하는 것이다. 사랑/인격성은 그 특성상 원하지 않는 대상에게 강제될 수 없다. 강제되는 사랑은 그 자체로 절대 선 안에서 존재할 수 없다.(대상이 자유로운 존재여야 하는 이유) 대상이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강제하는 것은 절대 선으로서는 할 수 없는 행위이며, 따라서 공의를 원하는 피조물은 사랑의 대상으로써 삼으려는 창조의 목적으로 부터 벗어나게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제 절대 선 안에 이전의 딜레마가 해소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완전한 피조물이 절대 선에게 공의를 원하는 경우 절대 선 안에 있었던 사랑/인격성의 속성과 공의성의 충돌은 해소되고 공의성의 속성(윤리,당위적 속성)만 남게 된다. 따라서 상황은 피조물에 대한 절대 선의 심판으로 향하게 된다.


2) 절대 선 앞에서 피조물이 취할 수 있는 반응(2) : 불완전한 피조물이 절대 선 앞에서 사랑/인격성을 원할 경우

피조물이 절대 선 앞에서 공의를 원했던 앞서의 경우 절대 선 안에 충돌하고 있었던 딜레마는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두 번째의 경우에는 그 충돌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피조물이 아무리 사랑/인격성을 원한다고 해도 공의적 속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 선이 불완전한 피조물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강제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절대 선이기에 가지는 원칙에 의거한다. 따라서 여전히 모순 상황은 지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번째 상황에서는 피조물이 절대 선의 완전한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모순 상황이 해결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피조물이 완전한 공의를 만족시키게 되는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구원은 있을 수 없게 된다. 뒤집어 말하면, 구원은 피조물이 완전한 공의를 만족시키지 않는 한 있을 수 없게 된다.


3) 구원의 원리

구원은 두번째 반응 즉, 불완전한 피조물이 절대 선 앞에서 사랑/인격성을 원하는 경우에 국한되어 일어난다. 이 시점이 바로 하나님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시점이며, 완전성으로 부터 불완전한 피조물을 향하여 완전함이 전가되는 시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불완전한 피조물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점을 해결하시고 자신의 완전한 공의성을 만족시키신다. 이 과정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지니는 의미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의 전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피조물이 스스로 사랑/인격성을 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피조물이 절대 선의 공의성을 바라는 경우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해당 피조물을 향해 의를 전가할 수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절대 선의 하나님은 모순 없이 창조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데, 피조물에게 자유가 있음과 동시에 피조물을 주권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14. 논점 정리

창조, 이 세계의 자유, 구원에 이르기 까지 모든 부분들을 면밀히 살펴 보았다. 이제 이 세상의 운행원리와 이 세상에서 제한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명확해지는 시점에 다다랐다.

절대 선은 절대 선이기에 사랑의 대상을 필연적으로 도출해야만 한다. 그래서 절대 선은 창조를 시작한다. 창조물은 절대 선과 독립된 자유가 있어야만 한다. 그렇기때문에 창조물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절대 선과 독립되어 불완전한 이 창조세계에서 절대 선은 완전한 사랑의 대상을 얻어내기 위하여 일련의 구원사를 펼친다. 그러나 불완전한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절대 선에게 사랑/인격성을 기대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따라 붙게 된다. 하나님은 이 조건에 만족하는 피조물들에게 완전성을 부여하여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것이 지금까지 논의한 절대 선으로부터 연역되는 논리적인 세계관이다.

이러한 세계관에 근거하여 비유를 들어 보도록 하겠다.




15. 금도금 공장 이야기

전자기기에 쓰이는 전자기판의 표면에 전도율을 높이기 위해 회로를 따라 도금을 하는 도금공장이 있다. 이 공장은 전자제품 생산 업체로 부터 외주를 받아서 구리로 만들어진 전자기판을 받아온다. 그리고 그 전자기판을 전해도금을 이용하여 금으로 도금한 뒤에 납품한다. 금도금된 제품의 납품을 위해서는 기판 표면에 최소 0.12마이크로미터 이상, 0.18마이크로미터 이하의 두께로 도금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전해도금 방법의 특성상 공정에서 도금의 두께를 마이크로미터 단위로 극히 일정하게 맞추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공장은 두께를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의 수단들을 사용한다. 전류를 일정하게 흘려보내기 위해 전류유지장치를 장창하고, 도금탕 내부의 밀도를 일정하게 하기위해 특수한 공법들을 동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금에는 도금탕의 미세한 대류현상, 공장 내부의 미세한 습도와 온도차이, 원판의 구리에 있는 미세한 저항차이 등등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요인들로 인해 결코 항상 일정한 두께를 내지 못한다. 따라서 공장은 매 시간 도금된 제품의 두께를 측정하여 전류값과 도금탕의 밀도를 미세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 5%정도의 불량제품은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 불량제품들은 공장의 책임은 아니다. 비록 공장의 손해이기는 하지만 공정과정 상 불가피한 결과이므로 공장은 이 손해를 고려하여 운영된다. 공장은 주도적이고 주권적으로 제품을 양산해 낸다. 그러나 공정 자체가 많은 변수들을 품고 있고, 공장으로 부터 자유한 물리계에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공장은 이를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6. 비유의 해석과 논리적 세계관의 탄생

양자물리학의 발전에 따라 양자영역에서의 관찰자효과, 역임현상, 불확정성의 원리 등으로 실존하는 물질의 확률적 존재성이 관찰되고 있을 때 이를 두고 아인슈타인은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고 이에 대해 닐스 보어는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전통적으로 칼빈의 선택교리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구원받을 자들과 구원받지 못할 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등의 모순들을 나았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바 이 세계는 자유가 있는 개체들이 무수하게 엮여있는 자유도 높은 세계이며, 그러나 세계 속에서 한명의 인간이 하나님께 사랑/인격성을 기대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분명 인간의 편에 구원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져 있지만, 한명의 개인이 그러한 선택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은 할 수 있는 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 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것이다. 도금공장을 설립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불량률을 최대한 낮추기 위해 애쓴 것 처럼. 그러나 자유가 있는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을 막는 것은 마치 창조 자체를 포기하는 일과 같다. 자유가 있는 창조와 구원의 조건이 충돌하여 빚어지는 필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금도금이 자유도 높은 물리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과 납품하는 제품에 두께의 조건이 있다는 점이 충돌하여 필연적으로 납품하지 못하는 제품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 처럼.

사랑/인격성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선택하여 주권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배푸는 쪽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의를 바라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책임은 아니다. 공장에서 물리계를 활용하여 제품을 생산해내는 쪽은 전적인 공장장의 의지이다. 여기서 제품이 선택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전적인 공장장의 선택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불량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자유도 높은 물리계의 탓이지 공장장의 책임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도 높은 세계 속에서 다양한 변수에 의해 개체화 되고 있는 인간이라는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사랑/인격성을 바란다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들을 선택하여 구원하신다. 그 조건은 사실 자유도 높은 세계의 변수들이 상호작용하여 만들어 내는 결과일 테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볼때 필연적으로 구원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분명히 자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구원을 결정짓는 것도 그 사람의 의지적 선택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의지적 선택은 무수히 많은 변수에 의해 제한되어 있으며, 결과적으로 볼때 그 사람의 구원 여부는 필연적인 것이다.




17. 결론

이로써 절대 선으로 부터 연역되는 논리적인 세계관에 따라 성립된 이 세계관은 그 동안 기독교 안에 난제로 자리잡고있던 많은 부분을 해소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세상의 악에 대한 신정론의 문제, 의의 전가에 있어서 직접전가와 간접전가의 문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문제등 그동안 신비에 붙이고, 모순으로 여겨졌던 많은 문제들이 일시에 해소된다.

이 세상은 하나의 공장과 같은 곳이고, 이 세상의 역사는 공장의 공정과정이다.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영원히 사랑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절대 선을 완성시킬 사랑의 대상들을 생산해 내는 하나의 거대하고 기나긴 공정과정이다. 절대 선이 만든 이 공정과정은 논리적으로 볼때 필연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오차나 예외가 있을 수 없는 완벽한 공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공정과정의 생산물이며, 그것은 자유도 높은 세상에서 필연적인 결과이자 그리스도인에게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생산품이 충분히 만들어졌거나 공장이 노후되어 더이상 생산품을 양산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공장은 철거되고, 생산품들은 애초의 창조 목적에 따라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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