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성육신적 제자도」의 간악한 간계
- 숲지기

- 2024년 1월 2일
- 3분 분량
기독교 복음의 은혜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인간은 죄에 빠졌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고, 하나님께 이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인간이 가진 죄의 삯을 대신 치러주셨다. 따라서 인간이 이를 믿고 받아들이면, 그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 죄가 하나도 없는 의인이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여기서 ‘값(ransom)’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것이다. 이 ‘값(ransom)’은 믿는 사람의 모든 죄를 사할 수 있을 만큼 비싼 것이다. 그리고 이토록 비싼 것이 우리에게 공짜로 제공된다. 이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기독교 복음에 있는 죄와 의의 전가를 이야기 할 때 기준이 되는 개념은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의식하는가?(의롭게 여기는가? 혹은 부끄러워하는가?)’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죄인이 되었다는 말은 바로 이 개념이 인간 안에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죗값을 대신 갚으셨다는 말은 바로 이 개념을 무용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이렇게 기독교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 볼 때 도출되는 기독교 윤리의 전제원칙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선해야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존재가 될 수 없다. 이는 기독교의 복음과 정면으로 대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행동이 선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무얼 대든지 나의 행동에 어떤 이유를 붙인다면, 이는 자신의 행위를 여전히 의식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기독교의 복음과 모순된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를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선을 바라보고 있기에 점점 닮아가게 되는 존재여야 한다. 일상의 예를 통해 이를 비유할 수 있다. 건강은 건강을 추구하고 살피는 것이 아니라 건강이 아닌 음식, 운동, 등을 추구할 때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결과다. 그리스도인에게 선한행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그것들 자체를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이는 여타 다른 종교의 윤리추구 방법)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됐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 이다.
본회퍼는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라는 명제로 믿음과 순종을 일치시킨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순종이 은혜의 조건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순종자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제안하는 은혜라고 말한다. 말 자체는 매우 옳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는 순종과 믿음과 은혜를 모두 순종하는 행위로 치환하고 있다. 언어를 매우 무용하고 논리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면서 논의를 흐리고 감정적인 동의를 끌어내는 듯하다. 그의 글에서 이러한 모순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먼저 각각의 단어가 가진 진짜 뜻에 동의한 뒤에 그러나 사실은 그 단어는 결국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이라고 말해버린다. 앞서 살펴본 기독교의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 가운데 연관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본회퍼와 같이 믿음과 행위를 일치시켜 버리는 간계에 쉽게 넘어가 버릴 수 있다. 믿음은 순종의 전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또한 은혜로 주어진다. 베드로는 믿었기 때문에 바다에 뛰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믿지 못했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믿음과 순종은 일치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을 결과적이고 관찰자적 시점으로만 이해해버린 것이다. 실제 모든 행동의 배후에는 ‘동기’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순종하는 모습의 배후에는 은혜로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이 있다.(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본회퍼가 이른바 값싼은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를 한낮 ‘위로’로 치부해 버린 탓이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은혜(비싼은혜)는 그 ‘위로’를 딛고 행동하는 은혜여야 한다. 그렇다면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위로’로 삼아 버린 것이 오히려 은혜를 ‘값싼은혜’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참혹하게 실감하고 난 뒤에 만나는 십자가의 대속은 단순히 ‘위로’삼을 수 없을 은혜이며, 감당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은혜이다. 이러한 은혜를 받으면 점점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옅어지고, 부지중에 하나님의 신부가 된 삶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내면이고 정체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랑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또한 사랑이 동기가 되는 것이며,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 또한 오직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만 한다. 믿음이 우리로 이 사랑에 빠지게 만들며,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선’이나 ‘진보’를 추구하거나 ‘양심’을 따르는 것과는 본질상 거리가 멀어진다. 우리는 ‘무엇이 선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지 않고 오직 ‘이 사랑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무엇이 선한 것인가?(무엇이 현실에서 믿음을 실천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나치 정권에 대항하여 독재를 몰아내고 하루 빨리 유대인들의 탄압을 멈추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그 거대하고 감격스러운 사랑에 빠지면, 전쟁을 끝내는 것 보다, 지금 눈앞에 신음하고 있는 총 맞은 적군 병사 한명에게 물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더 급하고 간절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또한 이를 대변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악에 빠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여 이 모든 악에 하루빨리 종말을 고하지 않으셨다. 그는 연약한 한 인간으로 오셔서 도살장의 어린양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는 그러면서도 눈앞에 자신을 조롱하는 한 영혼을 사랑하지 못해 안달하셨다. 우리가 만약 성육신적 제자도를 따르고자 할진데, 우리는 결단코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순종을 단순한 순종의 행위로 바꿔버리는 간악한 간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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